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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방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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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입니다.
방통

촉의 명사 방통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방통을 위나라의 순욱과 같은 급이라 평가하고 당대 명사인 사마휘는 와룡봉추라 하여 방통을 제갈량과 동일선상에 놓았다. 조금은 늦은 나이에 유비를 만나 빛을 보게 되어 남들보다 일찍 죽은 방통은 아무래도 다른 재사들에 비해 활약한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데 그의 어떠한 행보가 자신을 최정상급 책사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한 것인지 서술해 보고자 한다.

방통의 초기 생애

 방통은 형주의 명문가에서 나고 자라 수경 선생으로 널리 알려진 사마휘 밑에서 수학을 하며 서서와 한숭과 교우를 맺었다. 초기에 방통은 유표와 주유의 휘하에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유비가 형주를 점령하면서 방통은 유비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유비 또한 방통을 중요시하게 여기지 않아 뇌 양현의 현령으로 임명한 후 마음에 안 들어 면직을 시켰는데 이를 알게 된 손권 군의 노숙이 방통을 귀히 쓸 것을 권하는 서신을 보내고 곁에서 유비를 보좌하던 제갈량도 방통의 재능은 자신과 능히 견준다며 다시 재고할 것을 권하여 방통은 드디어 그의 재능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방통의 전략

 유비의 성격은 인의가 중심이 되고 온화한 성품인 데다가 참모로 있는 제갈량이 정석적인 정공법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방통의 상황에 따라 적합하게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전술은 유비군에게 새로운 방향을 가져왔다. 유비가 서촉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방통은 책략을 상중하로 나누어 권하였는데 상계는 정예병을 활용하여 곧장 성도를 공격하는 것이고, 중계는 양회와 고패를 먼저 처리한 후에 주변정리를 하며 진격하는 것이며, 하계는 한 발 물러나서 진출할 시기를 노리자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상계는 유비가 생각하기에 인의에 어긋난다고 느껴서 중계를 채택하여 결국 유장의 항복을 받으며 유비의 서촉 정벌에 큰 힘을 보태게 된다. 

방통의 죽음

 그의 죽음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 많은데 유리한 전장에서 지휘를 하다가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 당시 나이가 35세밖에 되지 않았다. 방통의 죽음은 촉나라에 큰 반향을 가져왔고 안 그래도 인재가 부족한 촉나라에게 있어서는 큰 재앙이었다. 방통이 죽기 전까지는 내정과 행정에 집중하였던 제갈량이 방통이 죽음으로써 전선에 참가하게 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방통의 군략을 대체할 사람이 원래 뛰어난 책략을 보여준 법정과 승상인 제갈량밖에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방통의 죽음으로 인해 법정과 제갈량의 업무과 더욱 과중되어 그들도 일에 치여 과로사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만약에 방통이 그렇게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좀 더 살아남아서 유비군을 계속 이끌었다면 삼국을 통일한 것은 위나라가 아닌 촉나라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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